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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FC서울의 레전드를 찾아서 ‘악바리’ 이영진과 ‘독수리’ 최용수 코치

2007-08-06



이제 막 입단한 새내기 프로축구선수가 자신이 처음 프로생활을 시작한 구단에서 선수로서 자신이 뜻한 결실을 맺고, 승리를 위해 그라운드를 달리는 선수로서의 역할을 다한 후에는 기꺼이 다시 자신의 하나뿐인 팀이 한층 더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 오래도록 자신을 성원해주는 팬들과 함께 한다는 것.

긴 호흡의 한 문장으로 표현할 만큼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나무가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자연의 당연한 섭리처럼, 계절이 변하고 한두 해가 지나가는 것처럼 저절로 이뤄지는 일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구를 사랑하는 많은 팬들은 오랜 시간 동안 그라운드 안팎에서 수많은 추억을 나눠 가진 진정한 나의 팀 선수에게 ‘레전드(Legend)’, 즉 팀의 ‘전설’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선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팬들과 후배 선수들의 곁에서 FC서울의 코치로 자신들의 축구인생을 채워나가고 있는 이영진, 최용수 코치의 존재는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악바리’ 이영진이 구단 창단 초기를 풍미했던 경쟁력 있는 미드필더 였다면, ‘독수리’ 최용수는 FC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든든한 다리역할을 해주었던 스트라이커였다. 그들의 레전드 속으로… 지금부터 들어가보자.



등 번호 20번의 전설, ‘악바리’ 이영진 코치

1985년에 럭키금성프로축구단에 입단한 ‘악바리’ 이영진 코치는 이듬 해인 1986년 부터 1997년까지(1996시즌 제외) 총 11시즌 동안 220경기에 출전하여 도움 28개(팀 통산 4위)와 공격포인트 39점(팀 통산 8위)의 기록을 남겼다.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았던 이영진 코치는 포지션 특성상 득점보다는 최전방 공격수의 득점을 돕는 ‘특급도우미’로 그 이름을 떨쳤다. 특히 90년대 초반 활약했던 팀의 공격수인 윤상철, 임근재 선수와의 호흡은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오죽하면 ‘악바리’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선수 시절의 이영진 코치는 169Cm라는 신장의 열세를 극복하고 특유의 지능적인 플레이와 그라운드 전체를 아우르는 넓은 시야, 그리고 풍부한 활동량이라는 자신만의 장점을 십분 활용했다. 거기에 악착 같은 승부 근성을 더했으니 다른 선수들에 비해 유난히 작고 파이팅 넘쳤던 이 선수가 상대팀 미드필더와의 중원 싸움에서 쉽게 물러서는 일은 결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선수시절 공격형 미드필더를 주로 맡았던 이영진 코치의 경기 모습은 때때로 현대 축구에서 ‘홀딩맨’ 이라고 부르는 수비형 미드필더를 연상시켰고, 경기에 나서면 자신을 마크하는 수비선수는 물론이거니와 자신과 같은 포지션을 맡고 있는 상대팀의 플레이메이커까지도 쉴 새 없이 괴롭히기 일쑤였다. 현대 축구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라는 포지션은 상대의 공격 전개를 사전에 지연 또는 차단하고, 팀의 새로운 공격작업을 전개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된다. 그래서인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수비형 미드필더들은 상대팀의 공격수와 미드필더를 압도할 수 있을 정도로 체격조건이 좋고, 다소 거친 플레이스타일을 가진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이영진 코치의 작지만 강한 모습은 그만큼 더 흡입력이 있었다. 미드필드 진영에서 공격은 물론 수비에서도 투쟁심이 넘치는 움직임으로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영진 코치에게 선수생활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1990년 럭키금성의 한국프로축구대회 우승 당시 이탈리아 월드컵 대표팀에 차출되어 대부분의 리그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 고재욱 감독이 이끌던 럭키금성은 최순호, 구상범, 이영진, 이영익 등 주전 중 4명이 월드컵 대표팀에 차출되는 가운데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시즌 내내 선두를 질주하여 결국 우승을 차지했고, 이영진 코치는 5경기에 출전해 2개의 도움을 기록했다.

지난 2006년 시즌 동안 지도자 연수를 떠나 잠시 팀에서 자리를 비웠던 이영진 코치는 현재 세레프 코치와 함께 1군 코치를 맡아 귀네슈 감독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좌하고 있다. 귀네슈 감독이 선이 굵고 큰 그림을 그리는 팀의 ‘아버지’ 역할을 수행한다면, 이영진 코치는 선수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챙기며 격려를 아끼지 않는 ‘어머니’의 역할을 맡고 있다. 물론 선수들이 잘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따끔한 충고도 아끼지 않는 그이기도 하다.

축구선수들 사이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같은 팀내에서 발을 맞추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의 움직임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패기 넘치는 신인선수로 프로생활을 시작한 이래, 플레잉 코치를 거쳐 코칭스태프에 합류하기까지 이영진 코치가 팬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시간만도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이렇듯 참 고집스럽게도 20여년 동안 단 한번도 변치 않은 ‘나는 곧 죽어도 FC서울!’이라는 굳건함을 바탕으로 팀을 위해 존재하는 이영진 코치의 활약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등 번호 11번의 전설, ‘독수리’ 최용수 코치

‘독수리’ 최용수 코치는 1994년 시즌부터 바로 지난 해인 2006년 시즌까지 (J리그에서 활약한 2001~2005시즌 제외) 총 8시즌 동안 148경기에 출전하여 54득점(팀 통산 2위)과 공격포인트 80점(팀 통산 2위)을 기록하였으며, 경기당 득점 또한 0.36점으로 역대 팀 내에서 100경기 이상 출전 선수들 중 최고의 득점율을 자랑한다. 그는 팀의 공격을 확실하게 마무리하는 역할을 하는 최전방 공격수로 입단 첫 해인 1994년 K리그 신인왕에 오르며 일찌감치 FC서울의 ‘레전드’가 될 선수로 기대를 모았다.

그리고 당시 팀의 새내기 공격수였던 최용수를 바라보던 팬들의 기대는 이미 현실이 되어있었다. 먹이를 한 번 포착하면 절대 놓치지 않는 ‘독수리’, 그의 별명처럼 최용수 코치의 머리와 발에 닿은 공은 상대팀의 골 네트를 다부지게 낚아채는 동시에 팬들의 가슴에는 격렬한 감동의 파도를 만들어냈다.

2000년 K리그를 우승으로 이끈 경험이 있는 최용수 코치의 활약은 단연 돋보였다. 총 34경기에 출장하여 14골 10도움을 기록하며 10년 만에 팀의 우승을 이끌었고, 그 해 리그 MVP 타이틀도 차지했다. 이제와 돌아보면 우승의 추억은 전설을 더욱 전설답게 만드는 촉매와도 같은 것이다. 2000년 시즌을 끝으로 최용수 코치는 J리그로 무대를 옮겨 선수생활을 지속했고, 2006년 플레잉 코치로 다시 돌아왔다. 그가 일본에서 활약하는 동안 팬들은 그에 대한 복귀를 손꼽아 기다린 것이 사실이었다. 팀의 우승을 이끌었던 최고의 스트라이커. 이렇듯 2000년의 우승에 대한 팬들의 향수는 곧 최용수 코치에 대한 향수이기도 했다.



최용수 코치는 지난해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이제는 본격적인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 FC서울의 우승을 위해 힘을 보태고 있다. 특히 다른 코치들과 비교하여 최용수 코치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는 이제는 그가 후배 선수들과 귀네슈 감독님 이하 코칭 스태프들을 연결하는 든든한 다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루가 다르게 고속성장을 하고 있는 FC서울의 공격수들의 플레이에 매 순간 영감을 주고 있으며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다.

1994년의 신인왕에서 2000년 정규리그 우승 당시의 MVP 선수로 우뚝 섰고, K리그와 J리그에서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한 최용수 코치는 다시 FC서울로 돌아와 마지막 선수생활을 정리하고 곧바로 지도자의 길에 입문했다. 산란을 위해 본능적으로 자신이 태어난 태초의 장소를 향해 회귀하는 연어처럼 자신이 처음 프로생활을 시작한 친정팀에 돌아온 그는 제 2, 제 3의 ‘독수리’ 최용수를 배출하는데 큰 힘을 보탤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항상 굳게 다문 그의 입가에 비장함이 묻어나는 이유는 아닐까.

FC서울의 레전드 이영진과 최용수 코치. 팬들이 아직도 그들을 보면 마음이 설레고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은 바로 FC서울과 함께 평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활약을 믿어보며 오늘도 하루 하루가 전설로 기록되고 있음을 느껴본다.

FC서울의 레전드를 찾아서-2
레전드를 향해 달려가는 김치곤&김동석

‘그대가 원하고 우리가 원한다’ 김치곤


선수에게 있어 소속팀에 대한 애정은 가장 기본적이자 필수적인 요건이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이 요건이 적어도 현대 축구의 중심축인 요즘 선수들에게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말하면 이해가 빠를지도 모르겠다. 소속팀에 대한 애정이라는 것은 원한다고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팀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소유하고 있는 선수들이 환영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한 팀에 발을 담가 선수 생명이 다할 때 까지 그 팀만을 바라보는 소위 레전드 혹은 반디에라를 찾아보기 힘든 요즘, 그래서 내 팀에 대한 약간의 애정이라도 보여준다면 그것만큼 반가운 일도 없는 듯 하다. 상황이 이런 요즘 ‘FC서울의 레전드가 되고 싶다’ 당당히 말하는 그는, 그래서 FC서울 팬들에게 소중하고 또 소중한 존재다.

No.22 김치곤. 입단 5년째에 접어들고 있는 그는 늘 팀에 대한 넘치는 애정으로 FC서울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잘해도 그 잘함이 드러나지 않기에, 작은 실수라도 그 크기보다 곱절은 되어 부각되기에, 외롭고 쓸쓸하며, 어쩌면 고난의 자리일지도 모를 최후방에서 김치곤은 FC서울의 검붉은 유니폼을 입고 상대의 거센 공격으로부터 FC서울을 든든히 지켜왔다. 단지 경기력만으로 선수를 평가해야 한다고 해도 주저 없이 엄지손가락을 들어주고 싶은 그이지만,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주고 싶게 만드는 이유는 결코 경기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인터뷰에서는 ‘팬’이라는 단어가 끊이질 않으며, ‘팬’에 대한 사랑이 짙은 만큼 ‘FC서울’에 대한 사랑도 짙다. FC서울 팬들에게 ‘FC서울’은 본인과 동일선상에 놓인, '내 팀'이자 곧 나이다. 그런 FC서울에 소속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넘치는 사랑을 주고 싶은 팬들에게 FC서울과 팬들에 대한 사랑으로 똘똘 뭉친 ‘김치곤’ 그는 보배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원하는 목표점을 찾아 더 높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축구 선수들에게 당연한 이상,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응원하고 지지하던 선수가 비운 자리를 보며 쓸쓸한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운명을 갖는다. 가 아꼈던 선수가 발전해가는 모습을 보며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있기에 영원히 내 팀에 남아 달라 욕심을 부릴 수야 없겠지만 내 팀에 영원히 남아줬으면 하며 조용히 바래보는 것이 팬들이다. 그래서 레전드에 목말라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FC서울 팬들에게 김치곤 그는 갈증을 해소해 주기에 충분하다. 물론 앞으로 그의 행보가 어떻게 될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팀에 대한 애정이라면 됐다. FC서울 팬들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FC서울의 검붉은 유니폼을 입고 살아온 지난 5년, 그가 보여준 믿음이 있기에, 그는 어쩌면 FC서울 팬들의 마음에 레전드 자리를 예약해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 남다른 애정’ 김동석

이탈리아 세리에A의 AC밀란에는 유난히 레전드가 많다. 이탈리아인들은 레전드를 ‘반디에라’라고 부르는데, 현 AC 밀란 유스팀 감독 프랑코 바레시를 필두로 얼마전 은퇴를 선언한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파울로 말디니까지 이들은 단 한번도 AC밀란이 아닌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어본 적이 없다. 푸른 잔디를 벗어난 순간에도 그들은 언제나 AC밀란의 일원이며 그래서 AC밀란의 팬들은 그들의 은퇴를 슬퍼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 AC밀란 팬의 인터뷰 에서는 이들의 팀 사랑은 처음부터 남달랐기에 이들이 반디에라 되어 줄 것 이라는 것을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문구를 찾아 볼 수 있다.

우리 FC서울에도 팀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뽐내는, 그래서 늘 우리 곁에 있어줄 것만 같은 선수가 하나 있다. 아직 어리지만, 그래서 더 대견한 김동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아직은 앳된 그를 보고 있자면 이제 갓 K리그에 입성한 신예인가 싶지만, 이미 정식으로 K리그 무대를 밟았으며, 4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FC서울과 함께 했다. 미래군 간의 경기에서 꾸준히 실력을 쌓아 2006년에 정식으로 K리그 데뷔전을 치른 그는 괄목성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빠른 성장세를 보이며, K리그 데뷔전을 치른 그해 자랑스레 국가대표팀에 입성하기도 했다.

유난히 빠른 몸놀림을 가진 그는 그 장점을 살려 남들보다 한걸음, 아니 두, 세 걸음 더 뛸 만큼 그라운드 위에서 충실하다. ‘축구가 아니면 죽는다’란 생각으로 시작한 프로생활, 더 큰 세상에서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는 김동석은 자신의 생각을 그렇게 그라운드에서 하나하나 입증해 나가고 있다. 더불어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의 모습 하나하나에서 뿜어져 나오는 FC서울에 대한 사랑. 그래서 FC서울의 팬들은 그라운드 위에 있는 그를 보는 것이 즐겁다.

팬들에 대한 사랑이 티나지 않는다 해도 FC서울에 대한 사랑이 티 난다면 팬들은 더 바랄 것이 없을 터. 위에서도 언급했듯 FC서울이 곧 나이기에 팀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선수가 한없이 고맙고 그래서 팬들은 그런 김동석이 고맙다. 늘 팀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그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진실, 혹, 그의 모습에서 진실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도 이내 그가 그라운드에서 그 진실을 증명하기에 팬들은 그라운드 위의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열광한다. 어쩌면 FC서울의 팬들은 운이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언급하고 있는 김동석을 포함해 그와 비슷한 또래의 선수들 모두 FC서울에 대한 넘치는 사랑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니 말이다. 그들은 ‘당연하다’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FC서울 팬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그것이 너무나 고맙기에 그 기쁨은 딱히 말로 표현이 되질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걸어가야 할 길이 아직도 먼 선수에게 ‘레전드’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선수가 부담을 느낄 수도 있는 문제이거니와 예민할 수도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레전드가 되어 주었으면’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 것은 이들이 그만큼 FC서울 팬들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컸다고 하면 이해가 될런지.

‘레전드’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수히 많을 것이다. 그렇기에 결코 가볍게 언급할 수 없는 단어이며 그래서도 안된느 단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두 선수의 미래에 조심스레 이 단어가 수식어로 자리 잡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이 단어가 가진 무수히 많은 의미 중 가장 큰 힘을 가진 의미 때문이 아닐까.

되도록이면 오래 내 팀의 선수로 두고 싶고, 되도록이면 그가 그라운드를 밟고 뛰는 모습을 오래 보고 싶고, 할 수 있다면 영원히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과 함께 뛰고 싶다는 의미. 지금 김치곤과 김동석 그리고 레전드를 함께 거론한 이유가 바로 이 의미인 것이다.

글=김광식, 공희연 FC서울 명예기자
사진=강동희 FC서울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