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영국에서 근대 축구가 태동할 무렵 당시 등번호는 선수들의 포지션을 구분하는 용도로 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1번은 골키퍼, 2번부터 5번까지는 수비수, 6번부터 9번까지는 미드필더, 10번과 11번은 공격수, 이런 형태이다. (전통을 중시하는 영국은 국가간의 친선 경기에선 주전 선수들에게 아직도 이런 방식으로 등번호를 지급한다. 그래서 베컴도 과거 대표팀에서 주전으로 뛰지 못했을 땐 자신의 상징과도 같던 7번을 달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이 점차 약해지고 등번호 선택에 제약이 사라지면서 선수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번호를 달 수 있게 되었고, 저마다 자신의 등번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또 다른 동기 부여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브라질 대표로 뛰었던 데니우손은 에이스 넘버인 10번 보다 두 배 더 잘하겠다는 의지로 20번을 달고 뛰기도 했으며 프랑스 출신의 레프트백 비센테 리자라쥐는 바이에른 뮌헨 시절 자신이 1969년생 이고 키와 몸무게가 169cm, 69kg라 69가 자신의 운명의 번호라 생각해 69번을 달고 뛰었다.
또 첼시의 주장 존 테리는 과거 팀의 전설로 활약했던 지안프랑코 졸라를 뛰어넘겠다는 의지로 현역시절 그가 달았던 25번에서 1을 더한 26번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FC서울 선수들의 등번호엔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을까? 지금부터 선수들의 등번호의 숨은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1. 고교 시절 영광을 FC서울에서도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담긴 박용호의 15번
박용호가 15번을 단 이유는 웬만한 서울팬 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2010년을 앞두고 주장에 선임된 박용호는 등번호를 4번에서 15번으로 바꾸었다. 이유는 부평고 재학 시절 전국대회 3관왕의 위업을 달성한 당시 15번을 달았던 박용호는 그 때의 기억을 FC서울에서 되살려 보겠다는 마음으로 15번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박용호가 좋아하는 등번호는 4번이다. 청소년대표, 올림픽대표에서도 4번을 달았고 FC서울에서도 4번을 유지했지만 프로입단 첫 해 우승 뒤 10년 동안 우승의 기쁨을 맛보지 못해 절실한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절실함이 통했는지 서울은 2010년 K리그와 컵대회를 동시 석권하며 박용호는 등번호 변경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
2. 우승으로 인해 애착이 생긴, 그리고 종교적인 의미가 포함된 최태욱의 33번
작년 시즌 중반 팀에 합류해 6골 2도움을 올리며 리그 우승에 큰 기여를 한 최태욱. 그는 작년 시즌부터 달았던 33번을 올해도 그대로 유지했다. 그간 11번과 16번을 즐겨 달았던 최태욱이라 33번은 팬들에게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 법한 번호지만 최태욱은 작년 33번을 달고 우승을 경험해서 번호에 애착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FC서울에 있는 동안은 33번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각광받는 번호가 아닌 만큼 좋은 플레이를 펼쳐 팬들의 기억에 남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최태욱은 33번에 종교적인 의미도 있다고 밝혔다. 종교적인 부분은 민감한 사안이라 깊은 얘기를 하는 것을 꺼려 했지만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의인 ‘삼위일체’ 와 연관이 있다고 귀띔했다.
3. 자신의 롤모델의 등번호를 선택한 문기한의 14번
작년 시즌까지 26번을 달았던 문기한은 올 시즌을 앞두고 등번호를 14번으로 교체했다. 이유는 현재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고 있는 사비 알론소를 롤모델로 삼고 있는데 그의 등번호가 14번이라 문기한 역시 14번을 선택한 것이다.
사비 알론소도 문기한과 같은 중앙 미드필더이고 너른 시야와 정확한 패싱력 등 중앙 미드필더로서 갖춰야 할 덕목들을 갖추고 있기에 이런 모습을 닮겠다는 문기한의 의지가 14번을 통해서 느껴진다.
과거 14번을 달고 좋은 모습을 보였던 경험도 14번을 선택하는데 한 몫 했다. 동북중 3학년 시절 14번을 달고 뛰었는데, 경기가 정말 잘 풀렸다 하고 2009년 U-20 청소년 월드컵 8강 진출의 주역으로 활약할 당시에도 14번을 달고 뛰었다. 현재 올림픽대표에서도 문기한의 등번호는 변함 없이 14번이다.
4. 많은 팬들이 기억해주고 스스로 특별한 번호라고 생각해 선택한 김동진의 4번
2006 독일 월드컵에서 보인 좋은 활약을 바탕으로 러시아 제니트에 진출했던 김동진. 그 후 울산을 거쳐 올해 FC서울로 복귀한 김동진은 등번호를 4번으로 결정했다. 김동진은 4번을 선택한 배경에 대해 FC서울에 입단 해 제니트로 이적하기 전까지도 4번을 달았고 많은 팬들이 김동진 하면 FC서울의 4번으로 기억하기에 스스로 특별한 번호라고 생각하고 있어 4번을 선택했다고 한다.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선 13번, 2006 독일 월드컵에선 3번을 달기도 했던 김동진이라 내심 다른 번호 선택도 예상됐지만, 그의 선택은 많은 팬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4번 이었다.
Bonus tip 하대성과 고명진의 등번호는 바뀐 것이다?
2010년 트레이드를 통해 FC서울에 입성한 하대성. 입단 당시 그는 22번을 희망했다. 하지만 고명진 역시 22번을 달고 싶어했다. 나이순으로 등번호를 정하는 FC서울의 특성상 하대성(1985년생) 고명진(1988년생)보다 3살 더 많아 22번을 차지하는데 좀 더 유리(?)했지만 고명진이 FC서울에 자신보다 더 오래 머물렀던 것을 감안한 하대성이 22번을 양보했고 자신은 고명진이 달았던 16번을 선택했다.
사실 하대성이 좋아하는 등번호는 7번. 기존 7번의 주인이던 김치우가 입대 하면서 올해 7번을 달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팀에서 한 번호로 계속 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올해도 16번을 선택했다고 한다.
글=김성수 FC서울 명예기자 go16korea2002@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