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a
share > 페이스북

NEWS & TV

News

[칼럼]귀네슈 감독과 병사들이여 역사를 만들 준비가 됐는가?

2009-11-20



*이 글은 오는 21일 전남전 매치데이뉴스에 실릴 내용입니다.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글이기에 여러분께 먼저 소개합니다. 내일 매치데이뉴스에서 다시 한번 느껴보실 수 있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기원전 4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저)는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이렇게 외쳤다.
큰 공을 세우고도 자신의 목숨을 조여 오는 정세(....情勢 )앞에 카이사르는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넘어 로마를 향해 진군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의 심정이었을까? 아니면 진퇴양난의 한 가운데서 어쩔 수 없이 뽑아 들었던 고통의 칼날을 생각했을까?

굳이 루비콘 강을 건너는 시저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살다보면 늘 우리에게는 결단의 순간이 다가 온다. 작은 전쟁터를 옮겨 놓은 듯 한 그라운드 역시 마찬가지다. 그 한 가운데서 백구의 전쟁을 지휘하는 축구감독 또한 시저 못지않은 용기와 결단, 승부수를 준비하며 승부의 세계에 올인한다.



지난 2006년 터키의 지도자 세놀 귀네슈는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서울에 입성했다.
한일월드컵 4강에 빛나는 명장 귀네슈의 한국 입성은 그 자체로 큰 뉴스였다. 또 서울에게는 새로운 시도였고, 귀네슈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 올해로 감독계약이 끝난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팀을 더 맡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향수병을 앓고있는 그가 터키로 돌아갈 것이란 얘기도 들린다. 그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언론과 팬들은 주의 깊게 그를 바라보고 있다. 물론, 그가 내릴 결정은 온전히 그의 몫이고, 그에게 달렸지만 팬들 입장에서는 계약기간 종료를 바라보는 게 즐겁지는 않다. 만약 그가 올 시즌을 끝으로 한국 땅을 떠난다면, 오늘부터 시작되는 6강 플레이오프 단판승부가 자칫하면 마지막 경기가 될 수도 있다.

귀네슈는 지난 3년간 서울의 지휘봉을 잡으면서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K리그에 어필했다.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철저히 실력위주의 스쿼드를 구성했고, 젊은 선수들을 대거 발탁하며 팀 컬라를 젊게 바꿔 놨다, 특히 공격과 수비가 따로 없는 공격하는 수비수, 수비하는 공격수를 길러내며 FC서울의 붉은 색깔에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덧칠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오래된 축구속설이 그를 통해 그라운드에 출현하기 시작했고, 공격의 즐거움과 반격의 짜릿함은 팬들을 춤추게 했다. 그가 보여준 열정과 변화는 그라운드의 격조마저 바꿔 놨다. 귀네슈의 지휘봉은 거친 상암벌을 품위가 넘치는 콜로세움으로 바꿔 놓기도 했고, 흰색 돛단배를 탄 관객들이 배우들과 덩실덩실 춤추는 오페라 극장이 되기도 했다. 2007년 4월에는 무려 5만 5397 명에 이르는 최다 관객들이 한강변을 따라, 한강을 넘어 상암벌로 몰려 들며 축제의 불꽃을 피웠다. 그가 있어 가능했고, 그가 주연이 돼 만든 당대의 화제작이었다. 거침없는 말투가 독설로 변질돼 돌아올 때도 있었지만, 팬들은 늘 그의 편이었다. 아니, 그 발칙한(?) 징계를 비웃기라도 하듯 한발 더 나아가 모금운동으로 ,따뜻한 말로 덮어주며 안아줬다.



그러는 사이 귀네슈는 상암벌을 벗어나 대한민국 곳곳의 전쟁터를 누비며,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때로는 승리했고, 또 때로는 패배의 쓴 맛을 봤다. 오로지 폼페이우스만을 편애하는 공정치 않은 원로원을 상대로 자신만의 축구철학을 설파하기도 했고, 부상 선수를 이끌며 패배가 기다리는 전장에 나서기도 했다. ‘드디어 때가 왔구나!’ 싶었을 때는 , 한 마디 항변도 못한 채 수족 같은 전사들을 해외리그로 떠나보내면서 , 떨어진 기동력과 화력에 하늘과 구단을 원망하기도 했다. 다 잡은 것 같았던 월계관이 멀어질 때에는 피가 거꾸로 쏟기도 했지만, 신(神) 아래 인명(人命)을 맡기겠노라고 다짐하며, 오히려 자신을 채찍질 했다. 흔들리는 배위에서 때로는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품위를 잃지 않는 끈기도 보여줬다.

그랬다. 팬들은 그런 그가 좋았다.
그래서 상암벌을 찾았고, 적병이 매복해 있는 원정길도 마다하지 않고 함께 했다. 이제 6강이란 큰 전투, 큰 판이 펼쳐진다. 그 무대는 로마가 아니라 상암벌이다. 그리고 그 상대는 폼페이우스의 군대가 아니라 광양벌에서 원정 온 제철병(製鐵兵)들이다. 한 번은 6대1의 대승을 거뒀고, 또 한 번은 1대1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팬들의 마음은 설렌다. 오랫동안 갈리아원정에 나갔다 돌아온 카이사르의 병사들을 반기듯 장군 귀네슈와 그 병사들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로마에 돌아와 로마를 평정해 주길 바라는 그 때 그 시절 민초들의 마음이다. 그들은 입을 열어 말하지도 않고, 표정을 짓지도 않는다. 그저 눈빛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채워지지 않은 끝없는 목마름을 보여줄 뿐이다.



시저는 폼페이우스와의 정면승부를 위해 루비콘 강을 건넜다.
꼼수가 아닌 정수였고, 두려움이 아닌 당당함이었고, 전광석화 같은 패기가 있었기에 결단을 내리고 진군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걸었고, 모든 것을 걸 수 있었기에 흔들림 없이 로마를 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인들의 그 뜨거운 눈빛을 읽고 로마의 새 주인이 됐다. 천만 서울시민에게 귀네슈 군단(軍團)은 카이사르의 영혼이 담긴 병사들이다.

귀네슈 장군과 병사들이여 !
그대들도 그토록 승리를 갈망하는 팬들의 눈빛을 읽을 수 있는가?
그대들도 카이사르의 병사처럼 몸을 던져 역사를 만들 준비가 돼 있는가?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글/박종복 KBS 축구팀장